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예 훈장 (문단 편집) === 실제 수여자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명예 훈장/수여자 목록)] 각종 매체를 통해 잘 알려진 수여자 위주로 나열했다. 수여받은 사람의 수가 총 3,535명이나 되는 만큼 문서 길이가 너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이름이 없다고 해서 훈장을 받을 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니란 말은 아니고 이 훈장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무공이 뛰어났던 사람이라는 것도 아니다. 명예 훈장은 창설 초기에 있었던 [[남북전쟁]] 당시 이것 외에 이렇다 할 무공 훈장이 없어 좀 잘 싸웠다 싶으면 수여 대상이 되어 창설 초창기에 남발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운디드니 학살사건]]에 가담한 20명의 장병들에게도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고, 그 훈장은 현대에도 유지되고 있다. 다만 20세기 들어 중간 단계의 훈장들이 여럿 생기고, 훈장 수여 규정이 엄격해져서 그 가치가 올라가 [[제2차 세계 대전]] 즈음에는 군 내·외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훈장이 되었다. 물론 미국이 참전한 전쟁 규모나 미국이 동원한 병력 수를 생각하면 이 수여자 수도 많다고 할 수 없다. 수여자들의 내역을 읽다보면 하나하나를 영화화해도 부족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 텐데, 실제로 [[핵소 고지]], [[위 워 솔저스]], [[블랙 호크 다운]], [[론 서바이버]], [[더 퍼시픽]], [[아웃포스트(2020)|아웃포스트]] 등의 영화가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 문서도 참조. 미국의 군함들이 워낙 많아 그 군함들에 붙일 만한 이름들이 바닥났고, 군함에는 전사자나 전쟁 영웅들의 이름을 붙이는 전통이 있다보니 명예 훈장이 수여된 사람들의 상당수(특히 해군·해병 출신)는 최신 전투함들의 함명으로 선정되고 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hittlesey1.jpg|width=100%]]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eorge_McMurtry.jpg|width=100%]]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elson_Holderman.jpg|width=100%]] || || 찰스 휘틀시 육군 중령[* 1921년 11월 뉴욕에서 아바나로 가는 배 안에서 실종되었다. 자살했을 것이라는 게 정론이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 조지 맥머트리 육군 대위 || 넬슨 홀더먼 육군 대위 ||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을 앞두고 77[[보병]][[사단(군사)|사단]] 308연대와 306·307연대 잔존병 500여 명을 이끌고 5,000명에 가까운 [[독일 제국군]] [[육군]]에 포위되어 필사의 항전을 벌여서 독일군 전선을 크게 무력화시켰다. 영화 '로스트 바탈리온'과 [[Sabaton]]의 노래 'The Lost Battalion'이 이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 [[파일:external/www.badassoftheweek.com/york.gif]] || || [[앨빈 C. 요크]] 육군 상병 ||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군 중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사병으로 뫼즈-아르곤 공세 당시 자신을 포함한 17명의 분대가 프랑스 샤텔셰에리 북쪽 223고지에 위치한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 무력화에 나서 무력화에 성공했으나 고지에 위치한 다른 기관총 진지에서의 기습으로 분대장을 비롯해 9명이 죽거나 다치고 분대에 이등병 7명 밖에 남지않자 단신으로 기관총 진지 무력화에 나서 자신의 [[M1917 엔필드]] 소총으로 진지 내의 독일군과 교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20명이 넘는 독일군을 사살했다. 소총의 총알이 다 떨어질 무렵 독일군 6명이 [[총검돌격]]을 해오자 재빨리 [[M1911]] 권총을 꺼내 6명 모두 사살하는데 성공했으며 그 와중에 기관총 진지를 지휘하던 독일군 장교가 그의 뒤로 우회해 그에게 권총을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가자 장교는 자신의 부대가 입은 피해상황을 고려하여 그에게 항복의사를 전달해왔다. 이 전투에서 그는 혼자서 32정의 독일군 기관총을 무력화했으며 최소 28명을 사살하고 132명의 포로를 생포했으며 그의 맹활약 덕분에 소속 부대였던 미 328보병연대는 목표였던 샤텔셰에리 북쪽의 철도 장악에 성공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Lt._General_James_Doolittle%2C_head_and_shoulders.jpg]] || || 제임스 둘리틀 육군[* 정확히는 육군 항공대 소속으로 훗날 공군이 창설되자 공군으로 전군했다.] 중령 || [[둘리틀 특공대]]의 바로 그분. 살아서 돌아온 뒤 [[계급 특진|대령을 건너뛰고 준장이 되어]][* 둘리틀의 진급은 진짜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파격적이었다. [[소령]]에 진급한 지 몇 개월 안 되어 [[둘리틀 특공대|둘리틀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서 [[중령]]이 되었고 그걸 성공했다고 바로 [[준장]]이 된 건데 '''소령에서 준장으로 올라간 게 같은 나이'''라는, 실로 괴물같은 고속승진을 한 것이다.]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중장으로 예편했지만 노년을 보내던 중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명예 공군 대장으로 진급시켰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MacArthur_Manila.jpg]] || ||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 "I shall return"과 [[인천상륙작전]]의 그 맥아더 맞다. 필리핀 바탄 반도에서 분전[*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안 해서 사기만 깎았다. 그냥 해당 지역에서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최악의 상황은 맥아더가 만들었지만-- 분전한 육군을 대리하여 받았다고 보는 게 옳다.] 하던 맥아더에게 호주로의 철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다. 아버지이자 육군 중장까지 지낸 아더 맥아더 주니어도 명예 훈장 수여자라 부자가 각각 명예 훈장을 받은 기록이 나왔다. || [[파일:Jonathan_M._Wainwright.jpg|width=100%]] || || [[조나단 웨인라이트]] 육군 대장 || 위의 맥아더 장군이 분전한 육군을 대리해 받았다면 웨인라이트 대장은 진짜로 분전해 받은 거나 다름없다. 그는 1941년 12월 8일 남방기간 중 처음으로 공격받은 필리핀을 무려 6개월 동안 지연전을 벌여 방어하는데 기여해 호주로 못 가게 하고 필리핀에서 병력을 소모하게 만들어 발목을 끝까지 붙잡아두었고 1942년 5월 8일 항복을 해 1945년 8월까지 전쟁 포로로 잡혀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5일과 17일에는 각각 대장으로 진급, 명예 훈장을 받아 인정받은 장군이자 명장이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Daniel_Inouye%2C_official_Senate_photo_portrait%2C_2008.jpg]] || || [[대니얼 이노우에]] 육군 대위 || 2012년 12월 사망하기 전까지 정치 생활 내내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의대를 다니고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하와이에서 [[진주만 공습]]에 이은 [[행정명령 9066호]]로 수용소에 끌려갈 위기에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제442연대전투단]] 소속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처음엔 의무병이었지만 전쟁이 길어지며 [[현지임관]]으로 장교가 된 뒤 독일군 기관총 방어진지 제압 작전에서 한 팔을 잃고도 소대를 잘 지휘한 공로가 인정받아 상이 기장과 청동십자훈장을 받았고, 2000년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빌 클린턴]] 대통령의 추천을 받아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최종 계급은 대위. 1963년 1월 [[하와이]] 주의 1대 연방 상원 의원에 당선된 후 2012년 12월 작고할 때까지 연방 상원 의원으로 9선의 기록을 달성하여 미국 역사상 네 번째, 非백인계 인종으로는 제일 오래 중앙 정계에 몸담은 기록을 가진 인물이다. 2012년 12월 작고한 뒤 장례식에서는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과 수많은 정계 인사들이 장례식에 참석했고 [[F-22|랩터]]의 추모 비행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이후 알레이 버크급 플라이트 IIA: 기술 실험 버전의 세번째 함정으로 예정된 DDG-118[* 미 해군 함선 중에서 일본계 함명으로는 강습상륙함 이오지마 이후 오랜만에 나오는 사례.]과 [[미합중국 국방부 청사|펜타곤]] 산하 아시아 태평양 지역 연구소, [[미국국립군의관의과대학]] 간호대학원 및 [[다니엘 K. 이노우에 국제공항]]의 명칭을 이노우에의 이름을 따 붙였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70px-Randy_Shughart.jpg|width=100%]]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70px-Gary_Gordon.jpg|width=100%]] || || 랜디 슈거트 육군 중사 || [[게리 고든]] 육군 상사 || 두 명의 [[델타 포스]] [[저격수]]. 영화 [[블랙 호크 다운]]으로 유명한 [[모가디슈 전투]]에서 2번째로 추락한 MH-60 페이브 호크 콜사인 슈퍼 64의 생존자인 조종사 마이클 듀란트를 보호하기 위해 상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청해서 민병대와 무수한 군중들 사이에 뛰어들었다. 당시에 ' 슈퍼 64' 가 추락한 위치 근처에 집들이 여러 채 있어서 반군들이 엄폐해서 사격하기 매우 좋았으며 건물과의 간격이 매우 좁아서 절대적으로 수비하기에 불리했지만 랜디 슈가트와 게리 고든은 반군 1000명 이상을 상대로 무려 2시간 이상 버텨낸다.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결국 끝도 없이 몰려오는 모두를 당해내지 못하고 전사했다. 타군인 미 해군에서도 그들을 기려 신형 군수지원함 2척에 그들의 이름을 붙였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Michael_P._Murphy.jpg]] || || [[마이클 머피]] 해군 대위 || [[네이비 씰]] 대원으로, 영화 [[론 서바이버]]에 나오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레드윙 작전]]의 정찰 임무를 수행 중 탈레반과의 교전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도 산악 지형이라 본부와의 통신이 되지 않자 동료들의 구출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개활지로 이동, 통신을 시도하여 지원군을 요청하는데 성공하고 이후 교전 끝에 전사했다. 알레이 버크급 구축함의 62번함 DDG-112에는 마이클 머피의 이름이 붙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Salvatore_Giunta_portrait.jpg]] || || 살바토레 쥔타 육군 하사 || 이탈리아계 미국인. 아프간 전쟁에서의 네 번째 수여자이자 [[베트남 전쟁]] 이후 최초로 생존자로서 명예 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2007년 10월 25일 아프가니스탄에서 매복에 걸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탈레반에 끌려가는 동료를 구해냈다. 미국 내의 반응도 아주 뜨거웠는데 [[스티븐 콜베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비롯해 여러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2011년 하사 계급까지 달고 전역하여 콜로라도 주립 대학교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Pappy_Boyington.jpg]] || || [[그레고리 보잉턴|그레고리 '패피' 보잉턴]] 해병 대령 || [[플라잉 타이거즈]]에 잠시 몸담은 적도 있는 [[미합중국 해병대#s-6|해병대 항공대]] 최고의 에이스(28대 격추). 보잉턴의 활약은 자서전 과 동명의 TV 드라마로 극화되었다(1970년대 후반 MBC TV에서도 방영). 하지만 모난 성격이라 이리저리 치고받기도 했으며 이런 성격 때문에 플라잉 타이거즈의 지휘관 클레어 센놀트 대령과 불화가 생겨서 팀을 나왔다. 원래 1944년에 명예 훈장 수훈이 결정된 상태였지만 하필 태평양 전쟁 말기를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일제 패망 이후에 풀려났기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수훈한 훈장을 [[해리 S. 트루먼]]에게서 받았다. 최종 계급은 대령.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84px-Baldomero_Lopez_-_portrait.jpg|width=100%]] || || [[발도메로 로페즈]] 해병 중위 || [[인천 상륙작전#s-2.5.3|인천상륙작전]] 항목 첫 번째 사진에서 맨 위쪽에 참호를 넘고 있는 군인. 유일하게 실전 경험이 없던 중위이며, 상륙 후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해 첫 번째 [[수류탄]]을 투척한 뒤 곧바로 두 번째 수류탄을 투척하려 했으나 적군의 자동화기에 가슴과 오른 어깨를 피격당해, 막 투척하려던 수류탄을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자신의 몸으로 그 수류탄을 덮어 대원들을 구했지만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전공을 기려 사후 추서되었다. * [[히로시 미야무라]]: 일본계 미국인으로서 6.25 전쟁에 참전해 훈장을 받았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BasiloneUSMC.jpg]] || || [[존 바실론]] 해병 중사 || 제2차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수훈. 얇게 퍼진 해병대 1개 보병대대의 방어선 전면으로 일본 육군 연대급 병력 3000여 명이 밀려오는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메탈슬러그 시리즈|전투 도중 고장난 기관총을 수리하거나 아군 기지까지 포화를 뚫고 돌아가 탄약을 메고 다시 돌아오는 등 미친듯이 활약을 펼쳤으며, 적들의 시체가 시야를 가로막자 '''적진으로''' 뛰어가서 시체담을 무너트리고 다시 돌아와 기관총을 갈기거나, 빈 총 무게만 무려 15㎏이 넘는 수랭식 브라우닝 M1917을 '''들고'''[* 이로 인해 손에 화상도 입었다. 참고로 빈 총 무게 기준으로 15kg이지, 전투시엔 냉각수가 차 있는 데다가 탄띠까지 장전한 상태라 20kg은 가볍게 넘겼다.] 일본군을 죽이기도 했다.]] 확인된 것만 37명 이상의 적을 사살해 생존한 채로 명예 훈장을 받고 전쟁채권 홍보 등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으나, 사무직으로 남는 것을 거부하고 해병 신병교육대 교관을 거쳐 다시 최전선 파병을 지원하여 제5해병사단에 배치되었지만 [[이오지마 전투]] 초반에 전사했다. 전사할 당시 계급은 중사. 후에 바실론의 이름을 딴 [[기어링급 구축함]]이 진수되었다. [[더 퍼시픽]]의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패피 보잉턴 대령과 함께 명예 훈장과 해군 십자장을 모두 받은 해병대원으로, 당연히 부사관으로는 유일.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31px-Audie_Murphy.jpg]] || || [[오디 머피]] 육군 소위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6세의 나이로 자원입대하여 이탈리아 전선, 프랑스 전선에서 용감히 싸워 은성무공훈장 등 여러 훈장을 받았으며, 현지임관으로 소위가 되었다. 1945년 1월 26일 홀츠마이어 전투에서 1개 소대 병력으로 독일군 2개 대대 병력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며, 특히 격파된 아군 [[M10 GMC]] 구축전차 포탑 위에 단신으로 뛰어올라가 포탑의 대공기총으로 독일군을 격퇴하면서 화력유도까지 해내는 공을 세워 명예 훈장을 받고 중위로 진급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자신의 전투를 영화화한 영화 'To Hell and Back'에 본인 역을 스스로 맡는 등 영화배우로 전업하여 활동하였고,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참전용사들의 [[PTSD]] 치료를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971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45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현재까지 미 육군 장병 중 가장 많은 훈장을 수훈한 사람이자 최단기간에 이등병에서 장교까지 올라갔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전후의 일이긴 하지만 유일한 명예 훈장 수훈 프리메이슨이란 기록도 가지고 있다. || [[파일:로메샤.jpg|width=100%]] || [[파일:카터.jpg|width=100%]] || || 클린튼 로메샤 육군 하사 || 타이 카터 육군 상병 || 베트남 전쟁 이후 살아서 명예 훈장 수여자가 2명이나 나온, '캄데쉬 전투'의 수여자들이다. 2009년 10월 3일 캄데쉬 전투 당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내고 소초 정문을 탈환하여 기지를 탈환한 전과를 이룬 로메샤 하사와 총성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중상을 입은 동료를 구한 카터 상병은 그 공을 인정받아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로메샤 하사는 전역한 뒤 자신이 명예 훈장을 받을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복무한 미 육군 제2보병사단[* 아프가니스탄 파견 전, 동두천의 캠프 케이시에서 근무한 주한미군이다.]에 자신의 명예 훈장을 기증하였고 자신이 겪었던 캄데쉬 전투에서의 상황을 묘사한 회고록을 출간하였다. 카터 상병은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뒤에, PTSD에 걸리게 되어 결국에는 하사 계급으로 중간에 전역하였고 현재는 자신과 같은 상황을 겪은 퇴역군인들을 치료하고 있다고 한다. 이 둘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아웃포스트(2020)|아웃포스트]]>가 있다. || [[파일:fv77Bab.jpg|width=100%]]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Captain_William_Swenson_HoH_Ceremony.jpg|width=100%]] || || 다코타 마이어 해병 병장[* 왼쪽 가슴에는, 상이군인에게 수여하는 [[퍼플 하트]] 훈장도 있다.] || 윌리엄 스웬슨 육군 대위[* 좌우의 인물은 미국 [[육군부|육군부 장관]]인 존 매큐와 미국 육군참모총장 [[레이먼드 오디어노]] 대장이다. 윌리엄 스웬슨도 굉장한 장신으로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D._Swenson#/media/File:William_D._Swenson_Medal_of_Honor.jpg|오바마와 키가 거의 같다.]]] || 다코타 마이어(1988년 6월 26일 ~)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2009년 9월 8일에 아프가니스탄 쿠나르 지방 간즈갈 계곡의 전투에 참여하여 [[탈레반]] 50명의 기습을 받았다. 이 기습으로 동료 미 해병대원 4명이 사망했고, 36명의 아프간 정부군이 발이 묶였다. 마이어 병장은 말리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한 다음, 동료인 로드리게스 차베즈 하사가 험비 운전을 하며 그 안속에서 마이어 병장은 험비의 상부에 있는 기관총을 잡고 5회 왕복을 하며 동료 미군의 시신 4구와 아프간 정부군을 구출했다. 이 과정에서 마이어 병장은, 4회째 왕복에서 오른팔에 총상을 입었다. 이후 마이어 병장은 전역하였고, 건설회사에 근무하던 중에 2011년 9월 15일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에서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이때 당시에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었고, 장난전화로 착각한 마이어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고 한다. 잠시 그 이후, 실제 상황임을 알게 된 마이어 병장은 담담하게 "대통령님과 맥주 한 잔 마시고 싶습니다." 라고 했다.[* 명예 훈장 수여를 알리기 위해 백악관에서 마이어가 일하는 곳으로 전화를 했는데, 마이어 병장은 지금은 현장에서 일하는 중이며 업무 시간에 다른 짓을 하면 수당을 받을 수 없다며 점심시간에 다시 전화하라고 했다. --감히 그 [[미국 대통령]]의 전화를 씹어버린 용자-- 이에 백악관에서는 그의 점심시간에 맞추어서 다시 마이어에게 통화를 했으며, 통화를 마친 마이어는 다시 일을 하러 갔다고 한다. 후에 백악관에서 열린 수여식에서, 오바마는 이 일화를 언급하며 "내 전화를 받아줘서 감사하다"는 조크를 했다.] 그는 역대 최연소 수여자이고,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생존한 미군으로는 3번째, 미 해병대에서는 첫 번째 수여자였다. 동료인 차베즈 하사는 명예 훈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두 번째로 급이 높은 'Navy Cross[* 해군 십자상, 육군 수훈 십자상과 동일하다.]'를 수여받았다. 윌리엄 스웬슨(1978년 11월 2일 ~)은 2002년에 미 육군 [[OCS]]로 임관한 장교이며, 마이어과 함께 간즈갈 계곡 전투에서 싸웠던 육군 대위다. 스웬슨은 당시 전투에서 구출 작전을 주도했고 그로 인해 명예 훈장 후보에도 올랐으나 탈락했다. 이유는 수뇌부에게 개겨서 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상부에 화력 지원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고, 이를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수뇌부에게 밉보인 스웬슨은 당연히 수훈에서 탈락했다. 훈장도 받지 못한 채 2011년에 전역을 했고, 그 이후 미혼인데다 무직인 상태로 살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스웬슨을 알던 종군기자가, 이후 마이어의 수훈과 그 전공에 의문을 품고 추적해 이러한 사실을 폭로했다. 마이어도, 자신의 저서에서 종군기자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해병대에서는 크게 반발했지만, 캘리포니아의 하원의원이 리언 패네타 국방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져서 2013년 10월 15일에 그는 명예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이어 역시 해당 전투에서 적지 않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수훈은 유지되었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3/10/14/0608000000AKR20131014003000071.HTML|참고 1]]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2041682|참고 2]] [[위키백과]]의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D._Swenson|스웬슨 대위 항목]] 역시 참고해도 좋다. 스웬슨은 2014년에 현역 신분으로 복귀하여, 다시 군인으로 근무하고 있다. 현재는 [[중령]] 계급이다. 보직은 [[미합중국 육군|미 육군]] 10산악사단 32보병연대 1대대장으로 근무중이며, 현재 명예 훈장을 수여 받은 유일한 현역 장교이다. || [[파일:external/americasbrave.last-memories.com/Sgt.%20William%20H.%20Carney%20%20%20%20Feb.%2029X%201840%20-%20Dec.%209X%201907778.jpg]] || || 윌리엄 H. 카니 육군 상사 || 남북전쟁 중 와그너 요새 공략 중 기수가 저격을 받아 쓰러지자 대신 깃발를 들고 돌격하였으며 연대장인 로버트 굴드 쇼 대령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을 성공적으로 퇴각시킨 공훈으로 받았다. 퇴각 당시에 총 4곳에 총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건졌다. 카니 상사는 미군 최초의 흑인이자 유색인종 부사관이며 또한 최초로 유색인종으로서 명예 훈장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카니 상사가 소속되었던 부대 또한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부대인 매사추세츠 54연대였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영광의 깃발]]이다. 영화 중에서 모건 프리먼이 맡은 역할이 카니 상사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 또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의 주인공인 티아나의 아버지 역시 카니를 모티브로 했다. 사족으로 맨 마지막에 나오는 쇼 대령과 부대원들이 조각된 기념비는 실존하는 것으로 보스턴에 있다. || [[파일:ApCCX9g.jpg|width=100%]] || || [[어니스트 에반스]] 해군 중령 || 보기 드문 [[아메리카 원주민]] 계열 출신이다. [[플레처급 구축함]] USS 존스턴 함장으로 [[태평양 전쟁]] 참전하여 [[레이테 만 해전]] 중 [[레이테 만 해전/경과#사마르 해전|사마르 해전]]에서 전사했다. 에반스가 속한 '태피 3'는 고작 최대 28대의 함재기를 수용하는 작은 항공모함인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6척과 [[구축함]]보다 작은 존 C 버틀러급 [[호위구축함]] 4척, 그리고 같은 플레처급 구축함이 존스턴을 포함한 3척뿐이었고, 상대는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 1척, [[나가토급 전함]] 나가토 1척,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와 하루나 2척, [[모가미급 중순양함]] [[쿠마노(중순양함)|쿠마노]]와 [[스즈야(중순양함)|스즈야]] 2척, [[타카오급 중순양함]]인 [[초카이]] 및 [[아가노급 경순양함]] 노시로, [[야하기(경순양함)|야하기]], [[카게로급|다]][[유구모급|수]][[시마카제급|의]] 구축함들로, 미국 태피 3의 모든 함선을 모아야 겨우 '''야마토 한 척'''과 배수량이 비슷한 실정이라 무장이 매우 빈약했다.[* [[5인치 38구경장 양용포|5인치 양용포]]와 어뢰, 함재기의 대함공격용 무장 vs [[야마토급 전함|460mm 함포]]를 위시한 각종 중, 대구경 함포 및 [[93식 어뢰|어뢰]]. 5인치 양용포는 약간 부실한 대수상함 화력이라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고 어뢰는 전함에게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지만 사거리, 표적까지의 도달시간 및 당시 전투 상황에선 발사 전까진 함포사격을 받으며 가야 한다는 리스크가 매우 컸다. 대함공격용 무장을 장비한 함재기의 공격은 태피 3에게 있어 매우 효과적인 대함 타격 수단이었고 실제로도 전투 중반 이후부터 아직 살아있던 함선들과 연계해 전과를 올렸지만, 그나마도 전투 초반부엔 함재기를 보호하려고 너무 급하게 이륙시키느라 일부에 대지상용 무장이나 기관총탄만 적재하고 일본 함대에 달려들어서 최대한 방해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함재기라는 변수만 제외한다면 일본 함대가 이기는 게 당연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명령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홀로''' 일본 주력 함대를 향해 돌격해, [[쿠마노(중순양함)|쿠마노]]의 함수를 어뢰로 날려버렸고, 대파된 쿠마노를 피하려던 [[스즈야(중순양함)|스즈야]]도 미군의 공습에 대파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공고와 야마토의 포에 큰 손상을 입혔지만, 호위항공모함을 노리고 접근하는 [[전위(삼국지)|일본 경순양함, 구축함들을 향해 '''또 홀로''' 덤벼들어서 전선을 흐트려 놓았다.]] 유감스럽게도 일본군의 공격으로 USS 존스턴이 격침되고 실종되고 말았지만, 에반스의 돌격은 태피 3의 다른 함선들에게도 용기를 주었으며, 에반스의 용기를 이어받은 태피 3 장병들은 용감하게 싸운 끝에 더글러스 맥아더를 비롯한 필리핀의 수많은 미군들을 구하고 일본을 무찔렀다. 사후 추서. || [[파일:external/image1.findagrave.com/29186886_127368477964.jpg]] || || 에드 W. "투 톨(Too Tall)" 프리먼 육군 소령 || 대위 시절 [[베트남 전쟁]]에서 헬리콥터 조종사로 활약했다. [[UH-1]] 휴이를 몰았다. 미군과 북베트남군 사이에서 벌어진 첫번째 전투인 [[이아드랑 전투]](Battle of Ia Drang)[* 영화 [[위 워 솔저스]]로 영화화되었다.]에서 자신과 편대장이 실어나른 육군 대대가 집중 포화를 받자 포화를 14차례나 뚫고 들어가 보급품을 운송하고 부상자 30명을 외부로 실어날랐다. 착륙 지점은 전투가 벌어지던 곳에서 불과 200여 m밖에 떨어지지 않았기에 프리먼의 헬리콥터도 사격에 노출되었고, 이 때문에 프리먼 대위는 팔과 다리에 총 4차례나 총상을 입었다. 부상을 입은 후 비행 부적합 판정을 받은 뒤에는 [[공병]]으로 전과했다. 프리먼의 편대장이었던 브루스 크랜달(Bruce Crandall) 소령 역시 같은 전투에서 활약하여 명예 훈장을 받았다. 훈장 추천 시기가 늦어서 당시에는 받지 못했지만 명예 훈장의 추천 시기 제한이 없어지면서 2001년 7월 16일에 수여받았다. 관련 영화로 [[위 워 솔져스]]가 있다. 영화에서 상부의 명령을 묵살하고 위험을 무릅쓴 헬리콥터 기동을 하는 파일럿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에드 프리먼 소령이다. 전투 이전에 진지에서 야구를 하다가 주인공인 무어 대령을 만나는데, 고증에 맞게 무어 대령보다 키가 머리 하나만큼 커서 무어 대령이 올려다봐야 했으며 콜사인도 "투 톨(Too Tall, 멀대)"이다. || [[파일:Dolw2lq.jpg|width=100%]] || || [[에밀 카폰]] 육군 대위 || [[천주교]] [[군종 신부]]. 6.25 전쟁에서 명예 훈장을 받은 이들 중 거의 유일한 비전투요원이자 [[사제]]. [[한국전쟁]]에 [[군종 신부]]로 참전하여 아군은 물론 적군까지도 가리지 않고 돌봤으며, 부상당한 적군에게도 대놓고 투항하라고 권유할 정도로 간 큰 인물. 운산 전투에서 포로가 된 뒤 같이 포로가 된 장병들의 탈출도 돕고 몰래 미사를 집전하고 부상당한 병들을 돌보았다. 종교 자체를 불허하는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심한 멸시를 받았고 자신의 배식도 본인은 별로 먹고싶지 않다며 둘러대고 동료 포로들에게 나눠주며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다가 세균에 감염되어 떨어진 체력과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신부이자 장교로서 모범이 된 인물이다. 동료 포로들도 그를 계급이 아닌 신부님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60여 년이 지난 2013년에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으며 미국 가톨릭에서는 카폰을 [[순교자]]로 인정해야 한다며 카폰 대위의 [[시성]]에 필요한 기적도 조사되는 등 시성 운동도 하고 있다고 한다.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신학생 시절 번역한 카폰 신부의 전기가 출간되기도 했다. 2021년 3월 5일 미국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이 하와이주 국립태평양묘지에 안장된 신원미상의 참전자 유해 중에서 카폰 신부의 유해를 찾아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 [[파일:external/www.thecross-photo.com/Watters.jpg|width=100%]] || || 찰스 조셉 워터스 육군 소령 || 카폰과 마찬가지로 육군 [[군종 신부]]다. [[베트남 전쟁]] 닥토 전투에서 공수작전 도중 부상당한 공수부대원들을 피신시키고 자신은 아군 항공기의 오폭으로 전사하여 사후 추서.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40px-DossDesmondT_USArmy.jpg]] || || [[데스몬드 도스]] 육군 상병 || 위의 카폰, 워터스와 함께 비전투요원으로서 훈장을 받은 사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신자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에 입대했지만 집총을 거부하고 대신 의무병과에 지원했다.[* 당시 미군 의무병은 무장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지휘검열이 있는 토요일에도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며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전투병과로 보직 변경을 하라는 지휘관의 설득을 거부해 군대 내에서 골칫거리 취급을 받았다. 미 육군 77사단 307보병연대 1대대 소속으로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되었는데 전투 내내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쓰러진 전우들을 일일이 확인해 생존자들을 아군 진지로 들어 날라 75명의 생명을 구했다.[* 정확히 75명은 아니다. 당시 동료 전우들은 100명 이상이라고 증언하였는데, 이에 반해 도스 본인은 50명도 안될 것이라며 겸손을 보이자 트루먼 대통령이 75명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중에는 일본군이 대놓고 수류탄을 던지는 참호 앞까지 가서 생존자 7명을 구한 것도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해당하지만 의무병으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우를 구한 행동으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2016년에는 그의 활약에 대한 영화인 [[핵소 고지]]가 개봉했다. 전세계 제7일안식교단에서는 성인급으로 추앙받는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62px-WilliamMcGonagle.jpg|width=100%]] || || 윌리엄 로렌 맥고나걸 해군 중령 || [[6일 전쟁]] 당시 리버티 사건에서 이스라엘 해군 어뢰정과 공군에게 피격당한 기술연구함(사실은 [[NSA]]와 공동운용하는 정보수집함) USS 리버티의 함장이었다. 이스라엘이 뒤늦게 구호지원을 제의했지만 쌩까고 자신도 부상을 당한 채로 USS 리버티를 지중해 미 해군기지까지 무사히 자력 항해하였다 살아서 명예 훈장을 받는다는 사실은 백악관 초청이 당연한 [[용자]]의 상징이지만, 이 사건 자체가 기밀이었기 때문에 해군부에서 조촐한 수여식만 거행했다.[* 이 사건에서 이스라엘군이 리버티함의 승조원들 전부를 몰살시키려고 공격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한번에 격침시키려 하였으나 오폭이었던 척 어물쩡 사과하고 구조를 제안한 것인데, 평범한 군함도 아닌 '최첨단 도감청 장비를 갖춘 정보수집함'이라면 이런 속내를 일찍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스라엘과 마찰을 빚기 싫은 미국 고위층에서 이를 싹 기밀로 묻어버렸으니 결국 현장 실무요원들만 죽어나갔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30px-William_F._Dean.jpg]] || || [[윌리엄 딘|윌리엄 F. 딘]] 육군 중장 || [[한국전쟁]] 당시 미 제24보병사단 사단장(소장 계급)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장군이다. 미 육군 24보병[[사단장]]으로서 대전 전투를 이끌었다. 인민군의 엄청난 공세에 맞서 수많은 전차를 부수는 등 분전했지만 버텨내지 못하고 본대와 떨어진 뒤에도 부상을 입고도 사단장으로서 로켓 포와 수류탄을 들고 싸우는 등 절박하게 본대와의 만남을 위해 애썼지만 끝내 전북 진안에서 주민의 밀고로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한편 미군에서는 [[작전 중 실종|실종]] 중 [[전사(죽음)|전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가 1950년 10월말 북진 중 평양 부근에서 포로로 잡은 북한군 병사의 진술로 미군에서도 이때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을 인지하였다고 한다.[[https://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509150233480550.pdf|6.25 전쟁사 제4권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166P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그렇지만 미군은 포로의 진술보다는 당시 상황을 놓고 봤을 때 [[전사(죽음)|전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을 하였는지 1951년 2월 16일에 [[명예훈장]]이 추서되었으며 부인과 자식들이 대리 수상을 하였다. 그 후 생사여부를 계속 조사 중 1951년 12월 18일 북한군이 오스트레일리아 종군기자 [[https://en.wikipedia.org/wiki/Wilfred_Burchett|월프레드 버체트]]를 초청해서 인터뷰를 시키면서 딘 장군이 생존해 있고 자신들이 포로로 잡고 있다는 것을 공개하면서 딘 소장의 상황이 명확하게 알려지게되었고 휴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일반 포로들을 교환한 빅 스위치 작전(Operation Big Switch)에 의해 1953년 9월 4일 석방되어 귀환하였다.[* [[윌리엄 F. 딘|딘]] 소장이 유엔군이 붙잡은 공산군 측 최고 계급의 포로인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으로 귀환했다는 설이 있지만 휴전 협정 과정에서 오랜 진통 끝에 유엔군과 공산군이 원칙적으로 자유 의사에 따라 귀환을 원하는 포로들을 모두 상대방에게 송환하기로 합의를 했었다. 즉 양 측이 포로 인원수 및 계급 등 조건에 따라 포로 교환을 진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엔군에서 리학구라는 고위급 장교 포로를 수용하고 있지 않았더라도 딘 소장은 귀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덧붙여 미군 측 기록에도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에 의해 귀환하였다는 근거자료는 찾기 힘들며 국내에서도 2000년대까지 딘 소장이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에 의해 귀환했다는 기사 등이 전혀 없었고 2010년대 이후 이런 설이 생겨났다.] 여담으로 도피 중 한국 민가에서 얻어먹은 김치나 마늘장아찌가 입에 맞았는지 나중에 미국에서도 종종 만들어 먹었다고 하며 전북 진안에는 딘 루트로 불리우는 딘 장군의 도주 루트가 둘레길, 트래킹 길로 조성되어 있다.[* 개판 오분전의 급조된 파병 부대를 가지고도 지연전을 훌륭히 성사시켰고 수적, 질적이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사단장이 몸소 전선에서 싸우는 등 그 공이 결국 포로가 됐음에도 적지 않았다. 더군더나 딘 소장은 인천상륙작전을 알고 있음에도 포로가 된 후 철저히 비밀을 유지했고 결국 한국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한국 입장에서도 참 고마운 장군.] 이후 미국으로 귀국 후 제6야전군 부사령관으로 몇 년 재직한 후 중장 진급과 동시에 퇴역하여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 [[파일:external/a.abcnews.com/ap_obama_carpenter_kb_140619_16x9_992.jpg|width=100%]] || || 윌리엄 카일 카펜터 해병 상병 || 아프간 전쟁에 해병대 제1사단 소속 자동소총 사수로 참전하여 2010년 전투 중 동료에게 수류탄이 날아오자 몸을 던져 수류탄 공격을 막아내고 '''동료와 함께 중상을 입은 채 살아남았지만'''(온전히 몸으로 덮은 것은 아니었다고) 얼굴과 오른팔에 중화상을 입어 한 눈을 잃었는데 이후 눈물겨운 재활과정이 언론에 보도되며 미국 전체가 감동받았다. 해병대에서 [[의병 제대]]한 뒤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체육교육을 공부했으며, 2014년 6월 19일 백악관에서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다. 생존하여 명예 훈장을 받은 인물로서 역대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2022년 결혼을 하였다. ||[[파일:external/imagizer.imageshack.us/8mOvNn.jpg|width=100%]]||[[파일:external/imagizer.imageshack.us/gY36Ju.jpg|width=100%]]||[[파일:external/imagizer.imageshack.us/MpQ6Yp.jpg|width=100%]]|| ||<-3> 에드워드 바이어스 해군 상사 || [[미합중국 해군특수전개발단|DEVGRU]] 소속. 바이어스 상사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라그만 주에서 [[탈레반]]에 의해 운전사와 통역사와 함께 납치된 '딜런 조셉' 박사의 인질 납치 첩보를 입수한 미국이 편성한 구출팀에 소속되어 작전에 참가하였다. 맨 처음 건물로 침투한 니콜라스 체크 중사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현장에서 즉사하였으나 바로 뒤에 있던 바이어스 상사는 탈레반과 교전을 시작하고 인질이 갇힌 독방까지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갑자기 달려드는 탈레반을 확인하고 맨손으로 제압한 후 총격전 중에 인질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방패|자기 몸으로 인질을 가려 보호하며]] 무사히 구출하도록 했다. [[네이비 씰|씰]]계 대원으로는 6번째이자 [[미합중국 해군특수전개발단|DEVGRU]] 대원으로는 첫번째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오하이오]] 출신의 바이어스 상사는 1979년생으로 현재 [age(1979-01-01)]세이며 1998년 해군에 [[의무병]]으로 입대 후 2002년 BUD/S 수료후 [[네이비 씰]] 대원으로 활동하다 2011년 [[미합중국 해군특수전개발단|DEVGRU]] 오퍼레이터가 되었으며 복무기간 동안 총 11번의 파병을 다녀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수여식에서 "바이어스 상사는 적을 맨손으로 제압하면서까지 동료들이 작전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왔고 전광석화와 같은 임무수행능력으로 인질과 동료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하였다. 20년간 해군에서 근무한 뒤 2019년 [[원사(계급)|원사]](Master Chief Petty Officer)로 전역하였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Munro.jpg]] || || 더글러스 알버트 먼로 해안 경비대 하사[* Signalman First Class. 국군에서는 번역시 이 계급을 하사로 보고 있지만 실질적인 위상을 감안하면 [[중사]]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 전무후무한 해안 경비대 출신의 명예 훈장 수여자다. 통신부사관으로, [[과달카날 전투]]의 제1차 마타나카우 전투에서 [[루이스 풀러]] 중령의 해병 7연대 소속 1대대가 전멸할 위기에 놓이자 일본군의 십자포화가 빗발치는 가운데 상륙주정을 이끌고 들어가서 기관총으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전사했지만 그 덕에 해병대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미군에서도 [[부심(은어)|부심]] 쩔어주기로 유명한 해병대가 진정한 은인이라며 떠받들 정도니 말 다했다. 해군에서도 먼로의 이름을 딴 구축함을 진수했고, 해안 경비대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모친 역시 해안 경비대에서 중위로 전역하였으며 'The Hero's Mother', 'Old Lady(여사님)' 등의 별명이 붙었다. 먼로 중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국토안보부]]가 [[워싱턴 D.C.]] 남동부에 짓고 있는 해안 경비대 본부 신청사의 명칭을 '더글러스 A. 먼로 빌딩'으로 정했으며, [[https://en.wikipedia.org/wiki/Legend-class_cutter|레전드 급]] 경비정에다 그의 이름을 붙여서 기리고 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James_Stockdale_Formal_Portrait.jpg]] || || [[제임스 스톡데일]] 해군 중장 || 중령 시절 [[베트남 전쟁]]에서 [[A-4]] 스카이호크를 조종하다 북베트남에서 격추된 뒤 포로수용소에서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정신력을 잃지 않고 버텨내며 끝내 살아 돌아온 공로로 수여.[* 포로로 살아온게 뭐 대수냐 싶을 수도 있지만…스톡데일의 항목에도 일부 나와있듯이 그는 북베트남의 비인간적인 포로 대우와 선전을 위한 각종 모략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힘을 내어 미군 포로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결국 꺾이지 않고 살아 돌아와 미군의 기상을 보여주었기에 그 공이 결코 작지 않았다. 비슷하게 제레미아 덴튼(Jeremiah Denton)은 눈을 깜빡임으로서 Torture이란 단어를 모스 부호를 통해 북베트남의 비인간적인 포로 대우를 알린 공로로 2등급 무공훈장인 해군수훈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가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온갖 [[고문]]이란 고문을 다 받고 조국으로 살아돌아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후 중장으로 퇴역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82px-Williams_HW.jpg|width=100%]] || || 허셜 우드로 윌리엄스(Hershel W. Williams) 해병 상병 || 별칭은 허셜 "우디" 윌리엄스(Hershel "Woody" Williams). [[미합중국 해병대]] 화염방사병 출신으로 1943년 미해병대에 입대하여 [[제2차 괌 전투]]에 참전한 후 1945년 2월 21일 [[이오지마 전투]]에도 참전해 약 32㎏에 달하는 [[화염방사기]]를 들고 [[일본군]]의 기관총 진지로 돌격해 화염방사기로 진지를 공격하고, 연료가 떨어지면 다시 뒤로 물러나 연료통을 교환한 후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행동을 '''무려 4시간 동안 반복'''해 '''총 7개의 진지들을 파괴'''했다.[* 화염방사병은 일본군 기관총 사수 입장에서 최우선 제거 대상인 걸 고려하면 목숨을 건 초인적인 행동을 4시간 동안 한 것이다. 그것도 일본군이 가장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싸웠던 이오지마에서였고, 4명의 동료들이 같이 투입되었지만 그들이 모두 전사해 홀로 일본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고. [[존 바실론]]과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그의 행적에 방송 자막에서는 '''Living Legend'''란 표현을 사용하여 그를 칭송했다.] 전후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45년 10월 5일 [[백악관]]에서 [[해리 S. 트루먼]]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명예 훈장을 받은 이후에도 미해병대에서 계속 복무하다가 1969년 전역했으며 최종 계급은 [[준위]]장 4호(CW4)였다. 이오지마 전투를 넘어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으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참전자들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그는 퇴역 이후에도 [[강연]], [[비영리 단체]] 우디 윌리엄스 재단(Woody Williams Foundation) 설립 등 현역·퇴역 군인들을 위해 다양한 곳에서 활동했다. 2018년 2월 4일에는 [[슈퍼볼 LII]]에 나와 그를 포함한 15명의 명예 훈장 수여자들을 대표하여 심판·선수들 앞에서 코인 토스를 하기도 했으며[* [[https://www.youtube.com/watch?v=FJa2n6KPcCA|슈퍼볼 전 인터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b2eGqQFlxSM|슈퍼볼에서 코인 토스를 하는 윌리엄스]]] 2020년 3월에는 본인의 이름이 붙은 [[원정이동기지선]] [[https://en.wikipedia.org/wiki/USS_Hershel_%22Woody%22_Williams|USS 허셜 "우디" 윌리엄스]]의 취역식에 참석하여 [[https://youtu.be/9Cib21-U-MA?t=3213|수병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가 태어난 [[웨스트버지니아]] 주에 있는 해안 경비대 무기고와 앞 문장에 언급한 2017년 8월에 진수·2020년 3월에 취역한 [[미합중국 해군]]의 2번째 [[루이스 풀러|루이스 B. 풀러]]급 원정이동기지선은 그의 이름을 붙여 그가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 2021년 [[https://www.youtube.com/watch?v=_E7nTKhviEo|증손자가 자신을 뒤이어 미 해병대 훈련소를 수료한 것]]을 지켜본 후 현지 시간으로 2022년 6월 29일, 9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https://twitter.com/USMC/status/1542177729906442241?cxt=HHwWgoC8ua-e9eYqAAAA|#]] [[데이비드 버거]] 해병대사령관은 [[https://twitter.com/CMC_MarineCorps/status/1542277489346711553?cxt=HHwWgsC8mZHNoucqAAAA|미합중국 해병대에는 많은 영웅들이 있지만 우디 윌리엄스는 오직 한 명뿐]]이라는 글을 [[트위터]]에 적어 그를 추모했으며 해병대는 [[F/A-18]] 2대, [[F-35]] 2대를 보내 [[플라이오버|'추모 편대 비행']]을 해주어 [[https://www.youtube.com/watch?v=hpMaIvBz7_A|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l_howard.jpg|width=100%]]|| || 로버트 L. 하워드 육군 대령 || 미 육군 [[미합중국 육군 특수작전부대|그린베레]] 출신으로 사병에서 시작해 대령으로 전역한, 그리고 전역 시 현역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수여받은 군인이었다. 하워드는 베트남전에 54개월간 참전하는 동안 8개의 퍼플하트[* 부상은 14번 당했다고 한다.], 4개의 동성 훈장, 은성훈장, 수훈 십자상, 그리고 명예 훈장을 수훈한 인물이다. 중사 계급으로 [[MACV-SOG]]에 소속되어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미군이 작전한 거의 모든 전역에 투입되었다. 또한 명예 훈장 수훈 추천을 3번을 전부 다른 작전에서 펼친 활약으로 추천되었으나, 캄보디아에서 비밀임무에 종사하고 있을 때의 전투였기 때문에 처음 2번의 추천은 다운그레이드되어 은성훈장과 수훈 십자상이 수훈되었다. 마지막의 북베트남 전역에서 실종 아군 수색구조 임무에서 헬리콥터에서 투입된 직후 2개 중대에 포위당해 소대장이 부상당하고 자신도 부상당한 상태에서 소대장 위치까지 기어가 응급처치를 한 뒤 낙오된 소대장을 끌고 소대가 위치한 지점까지 끌고 간 다음 구조 헬리콥터가 도착할때까지 항공지원을 받아가며 3시간 반 동안 방어를 지휘해 결국 탈출에 성공했다. 이 공로로 하워드는 명예 훈장과 퍼플하트를 수여받았다. 사망할 당시, 하워드는 가장 수훈한 훈장이 많은 명예 훈장 수여자였다. '''헨리 E. 어윈(Henry Erwin) 공군 상사''': [[https://www.youtube.com/watch?v=tzx8BkSwwWk|추천 후 최단 시간 내에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인물]].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 [[항공병]]으로, 1921년 태생이며 1942년에 입대했다. 직책은 [[육군 항공대]]의 [[B-29]] [[폭격기]]의 통신 담당 승무원이었다. 1945년 4월 12일, 폭격기 편대의 선두기에 탑승했는데 표적 표시용 [[백린연막탄]][* 선두기가 떨어뜨린 백린연막탄의 연기와 불꽃을 보고 후방에서 따라오던 기체들이 폭탄을 투하한다]을 투하하라는 지시를 받고 연막탄의 안전핀을 제거하고 낙하산에 매달아 투하하려 했는데, 신관 이상으로 연막탄이 조기격발되어 기체 안에서 터져버렸다. 1100도 불길을 뿜는 연막탄은 제멋대로 움직이며 어윈의 얼굴을 강타했고, 어윈은 그대로 양쪽 눈의 시력을 잃고 한쪽 귀가 타버리고 코가 뭉개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 후에는 백린 연기가 기체 안을 가득 채워 조종사가 자기 앞에 있는 계기판을 못 볼 지경이 되어 추락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어윈은 이 폭탄을 내버리면 승무원실의 바닥을 녹이고 폭탄창으로 들어가 다른 폭탄들을 유폭시킬 것이라 생각하였고, 이에 불붙은 백린탄을 '''맨손으로 감싸들고''' 기체 맨 앞의 부조종사석의 창문으로 향했다. 비행기 중간에서 폭탄을 들고 가던 어윈은 항법사의 책상이 앞을 가로막자 폭탄을 한쪽 옆구리에 끼고 다른 손으로 스프링 잠금장치를 풀고 책상을 밀어재낀 뒤, 양 눈이 멀고 불 붙은 폭탄을 맨손으로 든 상태에서 한 손으로 길을 더듬어가며 마침내 부조종석까지 도달했고, 폭탄을 기체 밖으로 던진 뒤에야 쓰러졌다. 연기가 걷히자 조종사는 비행기가 바다를 향해 다이빙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종간을 당겨 바다 위 90m 지점에서 간신히 비행기를 구했다. 승무원들은 어윈의 불 붙은 옷을 잘라내고, 응급처치를 했으나, 불 붙은 백린은 산소만 있으면 다 탈 때까지 꺼지지 않기 때문에 어윈의 몸에 묻은 백린 조각들은 계속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어윈은 의식이 있어서''' 극심한 고통의 와중에도 도리어 승조원들을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간신히 [[이오지마]]까지 도착한 기체에서 어윈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의사들은 어윈이 아직 살아있다는 데 놀랄 지경이었다. 몇 시간의 수술 끝에 일단 목숨은 건졌지만, 어윈의 상태는 워낙 위중해서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이후 훈장이 수여되기 까지의 상황도 매우 드라마틱한데, 지휘관이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새벽에 훈장 추서를 요청하는 전화를 자다 깨서 받았으나 상황을 설명받자 그 즉시 명예 훈장을 추천하고, [[전속부관]]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 용사가 죽기 전에 훈장을 가져 올 것'''" 을 지시했다. 어윈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은 분명해 보였고, 때문에 부관은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명예 훈장 재고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즉시 [[수송기]] 편으로 호놀룰루로 날아갔다. 그런데 그 재고라는 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훈장이었다. 부관은 그 박물관의 훈장을 훔쳐서 다시 특별 수송기 편으로 가져왔고, 그 동안 괌으로 후송된 어윈은 4월 19일 괌의 병실에서 훈장을 수여받았다. 놀랍게도 어윈은 이 혹독한 참사로 죽지 않았고, 향후 30개월 동안 41번의 대수술을 받아 시력을 회복하고 한쪽 팔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후유증으로 상시 [[선글라스]]를 끼고 살아야 했다. 이후 1947년 공군으로 전군하여 상사(Master Sergeant)로 장애 제대했다. 전역 이후에는 앨라배마 주 버밍엄에 있는 재향군인 병원에서 상담원으로 근무하였으며, 2002년에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 [[파일:몬수어하사.jpg|width=100%]] || || 마이클 A. 몬수어(Michael A. Monsoor) 해군 하사 || 1981년 4월 5일생으로, 해군 [[미합중국 해군/군사경찰|군사경찰]](Master At Arms)로 군생활을 시작해 [[네이비씰|특전]] 쪽으로 전과, 2006년 9월 29일에 이라크에서 작전 중 전사했다. [[Mk.48 LWMG]] 문서의 맨 처음 사진이 그의 실전 투입 중 찍힌 모습이다. 사후 명예 훈장을 받았으며, [[줌왈트급 구축함]] 2번함 DDG-1001이 그의 이름을 딴 USS 마이클 A. 몬수어 함으로 명명되었다. * 어니스트 코우마(Ernest R. Kouma) 육군 상사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계급은 당시 중사로, 1950년 8월 31일 [[낙동강 전선]]에서 [[M26 퍼싱]]을 타고 교전하던 도중 다른 보병들은 후퇴하고 그가 탄 퍼싱이 혼자 후미를 지키고 있었다. 곧이어 북한군 보병들이 그의 전차를 공격하였고, 어니스트는 전차포와 기관총을 이용해서 교전했다. 이 때의 교전은 퓨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북한군이 전차에 올라타자 직접 해치를 열고 기관단총을 쏘거나 포탑을 돌려서 북한군을 쳐 떨어뜨리는 일까지 있었다. 어니스트의 전차는 약 9시간 동안 교전하면서 250여명의 북한군을 사살했다. 어니스트의 전차에서 전사자는 없었다. 이후 1951년 5월 19일에 어니스트를 비롯한 장병들에게 트루먼 대통령이 직접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 * [[찰스 린드버그]] 공군 준장 * 윌리엄 H. 핏센바르거(William H. Pitsenbarger) 공군 하사 베트남 전쟁 당시 미 공군 [[파라레스큐]] 소속. 전사 32년만에 그의 부모님이 대신해서 명예 훈장을 받았다. || [[파일:토머스 페인.jpg|width=100%]] || || 토머스 페인(Thomas P. Payne) 육군 원사 || 9·11 테러를 보고 크게 분노하여 2002년 미 육군에 입대, [[제75레인저연대]]에서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작전에 여러 차례 참전한 후 OTC 선발과정을 통과하여 [[델타 포스]] 대원이 되었다. 중사 시절이던 2015년 10월 22일 이라크에서 대 [[ISIL]] 작전 도중 ISIL이 불타는 건물에 가둬놓은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 적의 사격에도 불구하고 건물로 진입하여 인질 37명을 구출하였다. 그가 직접 구출한 인질 37명을 포함하여 그 작전에서 구출된 인질은 75명에 달하며,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9월 11일 명예 훈장을 받았다. [[https://trumpwhitehouse.archives.gov/briefings-statements/president-donald-j-trump-to-award-the-medal-of-honor/?utm_source=twitter&utm_medium=social&utm_campaign=wh|#]] 현재 원사로 계속 델타 포스 복무 중이며, 최근에는 오스틴 스콧 밀러 [[ISAF]] 사령관[* 밀러 역시 델타포스 출신이며, 육군 대장임에도 불구하고 본인도 직접 M4 카빈으로 무장하고 다닌다.] 경호 팀 중에 있는 것이 목격된 바 있다. || [[파일:Ralph Puckett Jr_1.gif|width=100%]] || [[파일:kr_Ralph Puckett Jr_2.png|width=100%]] || ||<-2> 랠프 퍼켓 주니어(Ralph Puckett Jr.) 육군 대령 ||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군인. 한국전쟁 참전 당시 계급은 중위였다. 1950년 11월 25~26일 [[미 육군]] 특수부대인 [[제75레인저연대|제8군 레인저 중대]]에서 병력을 지휘하던 랠프 퍼켓 중위는 [[청천강]] 북쪽의 전략적 요충지인 205고지 점령 과정에서 중공군에 맞서 활약했다. 작전지 이동 도중 중공군의 공격을 받자 가까운 탱크에 올라 최전선으로 이동했고, 205고지 점령 과정에서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이 지휘하는 레인저 대원들과 함께 고지 전면 개활지에서 적의 총격을 유도하는 등 용맹하게 활약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과 한국군의 3배에 달하는 중공군의 반격에 퍼켓 중위는 수류탄 파편을 맞고 중상을 입는 부상을 포함한, 3번의 부상을 연이어 입었음에도 대피를 거부하고 작전을 지휘했다. 결국 11월 26일 03시에 자신을 버리고 후퇴하라는 명령을 부하들에게 내렸으나 2명의 부하가 명령을 거부하고 그를 안전지대에 옮기는 데에 성공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 이후 그가 활약한 205고지 점령 작전 역시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2021년 5월 21일, [[조 바이든]] 대통령이 명예 훈장을 수여했으며[* 이때 바이든 대통령이 전화로 퍼켓 주니어에게 훈장 수여를 알렸는데, 퍼켓 주니어는 대수롭지 않게 '''괜히 야단피우지 말고 그냥 우편으로 보내달라'''며 털털한 반응을 보였고, 바이든이 '''야단피울 만한 가치가 있다'''며 설득한 끝에 수여식에 직접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수여식에는 퍼켓 주니어의 손주 6명도 초대받았는데 미 전역에 흩어져 지낸 탓에 여행준비에 정신이 없었다는 후일담은 덤.], 수여식에는 외국 정상으로는 최초로 [[문재인]] 한국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56&aid=0011048870|#]] 당시 퍼켓 주니어는 고령으로 거동이 힘들어 휠체어를 타고 들어왔지만 훈장을 받기 전 수여 사유를 말하는 2분 50초의 적잖은 시간을 두 다리로, 허리를 곧게 피면서 당당한 자세로 서있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휠체어를 끌던 보조역을 맡던 여장교가 보행보조기를 가져다 놓은 것을 옆으로 치우고 부축을 권해도 그저 미소로 거절했다. 이렇게 서있던 이유는 당시 수여식에 온 두 국가원수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라고. 그래도 고령으로 인해 앞 뒤로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바이든 대통령과 여장교가 양 팔을 부축하면서 훈장 수여까지 끝까지 서있을 수 있었다. 당연히 훈장을 목에 거는 순간 현장에서도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